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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한마디 듣지 못하고〉 일제강제징용피해자 박해옥할머니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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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으로 강제동원돼 노역을 했던 피해자 박해옥할머니가 16일 투병끝에 별세했다. 

광주에서 오랫동안 투병을 해온 고인은 2019년 자녀들이 있는 전주로 옮겨 요양병원에서 생활했다. 

건강을 회복해 광주에 다시 오겠다며 남구에 거주하던 집과 생활하던 물품도 그대로 뒀지만 그 바람은 이루지 못했다.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에 따르면 박할머니는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순천남초를 졸업한 뒤 14세의 나이에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로 동원됐다. 

당시 일본인교장은 학교교사였던 언니를 들먹이며 <네가 앞장서야 하지 않겠냐>, <부모가 경찰에 잡혀가게 될거다>라고 고인을 협박했다. 

고인은 생전에 <자칫하면 언니신상에 해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거부하기도 어려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결국 고인은 일본에서 굶주림을 견디며 임금 한푼 받지 못하고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해방후 귀국했다.

고인은 지원단체의 도움으로 1999년 3월1일 일본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해 10여년에 걸친 법정투쟁을 벌였지만 2008년 11월11일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했다.

이후 2012년 10월24일 다시한번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광주지법에 소송을 제기했고 2018년 11월29일 대법원에서 승소확정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판결후 미쓰비시는 손해배상은 물론 사죄조차 하지 않았고, 그사이 소송을 제기한 5명의 피해자중 고인을 포함한 3명이 세상을 떠났다.

박할머니와 투쟁을 함께했던 양금덕할머니는 <일본의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하고 먼저 떠나보내 허망하다>며 <좋은 나라 가서 훨훨 날아다니라고 기도 많이 하겠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빈소는 전주예수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8일이다. 이후 완주 호정공원묘원에 안치될 예정이다.